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gsjn@daum.net |
2025년 02월 24일(월) 0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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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문의 세상 이야기를 쓸 날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최근 헌재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인간이 저렇게 비겁해질 수도 있나 하는 생각이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처럼 이익과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가 있지만, 자명한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힘들 것이다. 더구나 평생 검사로 살아온 인물이, 거짓말하는 모습을 정말 많이 지켜봤을 업에 종사한 자가 해대는 거짓말에 모든 국민이 지쳐가고 있다. 달성하기 힘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최소 남자도 아니구나, 검사였다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또 모든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대통령을 보고 있노라니 남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헌재에서 총리와 한자리에 있는 자체가 국익 어쩌니저쩌니하는 위인을 남의 나라에서 보고 뭐라 논평을 하고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할지.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하지만, 작금의 정치판 선출직은 무게에는 관심이 없고 왕관만 쓰고 싶어 한다. 왕관의 무게에 대해 논하면 매우 싫어하고 어떤 이는 성질을 부리기도 하고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선출직에 나설 때의 초심은 사라지고 왕관을 차지한 오만함이 곳곳에 드러나는 현장을 볼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선출직 당선을 도왔던 이들은 “변했다”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서운하다고 하소연할 필요도 없다. 비록 그 자리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자리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의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나선 것인지 사람 일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지만, 사람처럼 그때마다, 상황마다 변하기 쉬운 동물도 없다. 왕관은 사람을 철저히 변하게 하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그런 악마와 같은 왕관을 우리는 존중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에 익숙하다.
비상계엄에 대해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고 간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말이 말이 아니고 궤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크고 작은 왕관을 쓴 자들의 한심함이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또 그들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왕관을 씌워주고 예전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거기에 머리를 숙이고 존중을 표할 것이다. 왕관은 언론 감시의 표적이라고 표현하면 지나칠까. 언론의 왕관에 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많다. 그들의 말이 뉴스가 되고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특종이 되는 세상. 행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다. 언론의 감시가 싫다면 왕관을 쓰지 않으면 된다. 크고 작은 왕관들은 젊은 기자들의 질문에 존댓말로, 예를 갖추고 답변하는 이유는 언론의 질문은 유권자를 대신함이기 때문이다.
작은 언론사 한 곳, 기자 한 명 배척하고 짓밟고 탄압해도 반드시 새벽이 오는 이유는 또 다른 수많은 언론이 있고 진실은 언젠가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닭의 모가지를 아무리 비틀어도 수많은 닭이 남아 있듯이 말이다.
gsjn@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