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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④ ‘철도에서 낳고 철도에서 성장하려는 송정리 전남에서 목포 다음가는 제2의 경제지’ 소개

기획연재 ④ ‘철도에서 낳고 철도에서 성장하려는 송정리 전남에서 목포 다음가는 제2의 경제지’ 소개
1917년 일본인 작성 ‘광주지방사정 송정리관’서 밝혀
일제강점기, 목포-송정리 호남철도 개통 일본인 몰려
거대한 농장 경영, 농토 독식 잡화점, 정미소 등 운영
  • 입력 : 2021. 02.23(화) 14:48
  • 광산저널
5공화국 정권 당시 1987년 시작된 평화의 댐(平和의 dam) 건설은 대국민 사기극으로 밝혀졌고 국민의 성금 모금을 강요한 사건이다. 1987년 무렵 송정역에서 평화의 댐(平和의 dam) 건설 성금을 모으기 위해 모여있다.
[광산저널] 일제강점기, 1912~1913년 호남철도 목포-송정리 구간이 개통되자 송정리에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여러 명이 출자해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며 농토를 독식하고 잡화점, 정미소 등을 운영하며 전남산 미곡과 가마니 등을 수출하는 등 농상공업 전반에 영향력을 미쳤다.

장성 헌병분대 송정리 파견소 설치에 이어 송정리 우편소가 창설되면서 집을 구할 수 없을 정도였고, 밤낮으로 일본 현악기인 샤미센(三味線) 소리와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자연경관은 황룡강과 극락강의 합류 및 유로 변화에 따른 평야 지대가 특징이며, 인문지리 경관은 송정역을 중심으로 한 역전의 홍등가, 여인숙 거리와 소촌동 일대 철길마을, 상업지대로 1913 송정역 시장과 일제강점기 거리 경관으로 명동거리가 있다. 그 외 미군 주둔의 기억이 남아 있는 용보마을과 공항의 메타세쿼이아길, 관제 타워, 비행기 격납고 등은 향후 독특한 군사경관으로 가치가 있다. (중략)

1917년 일본인이 작성한 광주지방사정 송정리관에는 ‘철도에서 낳고 철도에서 성장하려는 송정리는 전남에서 목포 다음가는 제2의 경제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주변의 농촌 마을보다 빼어난 형성으로 자연의 혜택을 받은 지역이라며 발전의 동력은 미곡, 새끼, 가마니 및 부산물이라고 했다. (중략)

일제강점기 제작된 지도 가운데 1917년 광주 지도와 1931년 송정리 지도는 지금의 광산로를 중심으로 늘어선 점포의 모습과 관공서 등 주요 시설이 표시되어 있다. 1917년 지도는 1931년 지도에 비해 간단하나 황룡강 지류가 어떻게 흘렀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에는 지금의 ‘광산로’를 중심으로 우편소, 면사무소, 은행, 학교, 사찰, 시장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이 시기 광산로 인근에는 사찰 2개소가 있었다. 1930년 자료에는 송정리에 포교소 2개소가 있다고 나오는데 앞서 지도에 표시된 일본 불교 사찰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큰 도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상가가 그려져 있고 주요 건물 이름도 명시되어 있다. (중략)

현재의 지도와 겹쳐서 비교해보면 당시 상가가 밀집해 있던 주도로는 ‘광산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로는 유지되고 있다. 소학교는 송정중학교로 바뀌었다. 당시 시장은 지금의 내상로51번길, 53번 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시기 건물 중 주목되는 것은 ‘송영좌’와 ‘욱좌’다. ‘송영좌’는 1920년대에 송정리에 있던 극장이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만 언급되고 있는 점과 1931년 지도에 명시된 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에 잠시 있다가 없어진 극장으로 보인다.

특히 1926년 송정 노동조합 창립총회와 임시대회 개최 당시 150여 명의 조합원과 수백 명의 방청객이 모여 성황리에 마쳤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송영좌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욱좌’는 현재 송정역 센트럴시티 오피스텔(송정동 840-33) 광장 자리에 있었다. 욱좌와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나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이후 송정 극장이 되었다는 흔적은 있다.

광산저널 webmaster@gsj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