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휴대전화번호는 018로 시작한다. 이제 이런 번호는 희귀번호에 속한다. 죄다들 스마트폰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런 구식 휴대폰은 지인들에게도 별종으로 취급받는다. “아직도 그런 번호를 쓰세요?” 뭐, 난 하등 불편함이 없으니까 계속 사용할 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하루에도 열 통 이상씩 ‘신청한 돈이 승인되었으니 꿔가라’는 나도 모르는 문자 메시지가 쇄도한다. 오죽 가난하면 여태 구식 번호를 쓰느냐, 이 사람 돈이 필요하겠지, 해서 보이스 피싱, 멍청한 융자금 대상으로 꼽히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이제 나도 요령이 생겨서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 목소리로 꼬여도 전화뚜껑을 닫고 만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많은 사설 금융업체들이 내 전화번호를 알고 문자 메시지로 공격하는 것일까. 얼마 전 우리나라 주요 은행의 고객 신상정보가 다 털렸는데, 외국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까지 전화를 걸어 책임자를 엄벌하라고 했다는 기사를 보고 감을 잡았다.
나도 어쩌면 그 피해자일 수도 있다 싶었다. 사실 비밀스런 개인 신상정보라는 것이 한국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털리고 털려서 모든 금융기관을 거래하는 고객들의 신상정보는 이미 국내의 사설 금융업체들은 물론이거니와 중국, 북한에서까지 공유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휴대전화번호, 이름, 나이, 직장, 주소, 금융거래 내역 등등. 인터넷 검색으로 가능한 당신에 관한 모든 신상정보는 더 이상 개인정보라고 할 것도 없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반 공개된 정보가 되어 이제 뭐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게 돼버렸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충고를 해주었던 내 친구의 혜안을 찬탄한다. 그는 오래 전에 날더러 인터넷에 가입도 말고, 이메일도 쓰지 말고, 좌우간 들여다보기만 하라고 했다. 에끼, 그렇게 어떻게 사느냐고 퉁을 준 일이 있지만 누가 내가 날마다 어디서 무엇을 구매하고, 세금은 얼마나 냈고, 재산은 얼마고, 병원엔 무엇을 치료받았는지를 죄다 꿰고 있다면 기분이 상당히 나쁘지 않을까.
이번에 37세의 어떤 금융관련 회사 직원이 USB에 1억 건이 넘는 개인 신상정보 자료를 금융기관들에서 빼돌려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 것이 적발되었다. 그것도 열 달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을 이제야 의기양양하게 우리 당국이 찾아낸 것이다. 풋, 풋, 풋.
금융기관이라는 자들은 그들의 위치를 물어보려 전화를 하는 데도 먼저 주민등록번호를 외라고 한다. 그 별놈의 주민등록번호. 정말 화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금융기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어디나 할 것 없이 관공서에서조차 문의만 하려는 데도 주민등록번호를 대라고 하니,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주면 내 신상정보는 고구마 줄기를 캐듯이 여기저기서 줄줄이 엮어 털 수 있다.
나라 살림을 하고 국민의 안전을 돌보아야 할 장관이라는 자들, 국회의원이라는 자들, 그리고 금융기관의 수장이라는 자들은 정말 개인 신상정보가 털리게끔 되어 있는 이런 시스템을 개혁할 의지가 전혀 없거나 아예 이쪽에는 무식한 자들임이 분명해 보인다.
여기에 시시콜콜히 다 쓸 수가 없어서 그렇지 누군가는 누가 병원에 소파수술을 하러 간 것까지 열람한 적도 있다. 개인의 비밀은 가상공간에서도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