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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의 인물’ ‘사회 변혁가’ 임동규는 누구인가

광산의 인물, 故 임동규 24반무예 경당협회 총재
‘광산의 인물’ ‘사회 변혁가’ 임동규는 누구인가
1939년 2월 광산군 본량면 지산리 탑동마을 生
무예인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민족운동 앞장서
당시 민주인사들로부터 ‘빗자루 도사’ 별칭 얻어
  • 입력 : 2020. 11.13(금) 12:50
지난 9월 21일에 민족통일운동가이자 24반무예 명인인 용진(聳珍) 임동규(林東圭) 총재(사단법인 24반무예 경당협회)가 별세했다.
광주와 전국의 민족민주시민단체는 논의를 통해 ‘민주 사회장’으로 정하고 장례를 치렀으며 망월동 민족 민주열사 묘역에 고인을 안치했다.
조선 시대 정조대왕에 의해서 편찬 군사훈련 교범이었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24반무예(二十四般武藝)를 복원했으며 당시 민주인사들로부터 ‘빗자루 도사’라는 별칭도 얻었다.
1988년에 가석방되고 1989년 7월 1일에 민족 무예 도장 경당을 설립해서 24반무예를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등 민족 무예의 이론화 작업과 복원 및 계승 작업에 전념했다.
‘광산의 인물’이자 ‘사회 변혁가’였으며, 시대를 앞서가고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해왔던 용진 임동규 총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임동규 선생이 걸어온 길>

임동규 선생님은 1939년 2월 19일에 전라남도 광산군 본량면 지산리 탑동마을에서 출생했다.
본량초등학교,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입학했다.
서울대 재학시절에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대 농대생 이우재 등과 함께 ‘남산농촌사회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서호연, 이우재, 홍갑표, 신재억 등과 함께 ‘구농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협업농장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을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농촌문제 해결을 위해 대중운동을 시작했다.
1962년에는 당시 농촌문제 및 사회운동가들의 토론장 이었던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1964년에 인혁당 사건으로,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1971년에는 박현채 선생님과 함께 ‘대중 경제 100문 100답’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후 농업근대화연구회 사무국장으로 서울농대 김문식 교수, 이대 법대 최병욱 교수 등과 함께 연구 활동 및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975년에는 단순한 체육인 아닌 무예인으로서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민족운동을 하기 위해 세계정도술협회 사무국장을 맡아서 정도술 수련과 보급에 노력했다.
또한, 조선 시대 정조대왕에 의해 편찬된 국방 무예 교범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24반무예 중 권법, 곤방 등 일부 무예를 정도술 달인인 안호혜 선생과 함께 복원하는 일을 했다.

1976년에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총무부장을 맡아서 노동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1979년 3월에 통일혁명당 재건위원회(약칭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지정관, 김재욱, 양정규 등과 함께 체포돼 무기 징역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약칭 남민전) 사건(소위 남민전 인민무력부장)으로 무기 징역형을 또 선고받는 등 유사 이래 처음으로 쌍(雙)무기수가 됐다.
약 10년간 감옥에서 보내면서 ‘무예도보통지 24반무예’ 복원작업에 매진했고 문익환 목사가 ‘빗자루 도사’라는 별명을 지어 부르기도 했다.

1988년 12월 20일에 민주화의 열풍으로 석방돼 이듬해 7월 1일에 민족 무예 도장 경당(총관장)과 우리 무예 연구회(회장)를 창했다.

임동규 선생은 ‘체육으로서의 무예만이 아니라 민족학의 연구, 인격교육’을 통해 오늘의 국제화된 사회에서 뚜렷한 주체의식과 민족적 긍지를 갖춘 민족 간부의 양성을 목표로 활동했다.

당시 전국 150개 대학 중 100여 개 대학에 경당 동아리가 결성됐고 운동권 학생의 생활총화로서 무예 수련이 활용됐고 전국에 250명의 사범과 10만 명이 넘는 수련생을 배출해왔다.

1990년에 『한국의 전통무예』를, 1991년에 『무예사연구』를, 1996년에는 『실연 주해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했다.

1992년에는 민족 무예 도장 경당을 자신의 고향인 광주 광산구 탑동마을에 이전해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상무 정신과 조선의 선비정신을 잇는 문무겸비의 민족 간부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