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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평산 신 씨(平山申氏) 개촌 알려져

마을탐방 / 임곡동
조선 초기 평산 신 씨(平山申氏) 개촌 알려져
행주기씨 광곡·신촌, 죽산박씨 원임곡, 밀양박씨 연동마을
평택임씨 내·외등, 함평이씨 방혜마을, 청송심씨 신봉정마을
용진산 금광 일제 수탈 위해 전기 가설과 임곡역 문 열어
  • 입력 : 2022. 08.24(수) 16:37
  • 광산저널
[광산저널] 광산구 서북단에 위치한 임곡동은 하남동, 어룡동, 본량동과 장성군 황룡면 옥정리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용진산과 어등산 사이로 흐르는 황룡강은 기름진 옥토를 제공하여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면 강변 마을이나 농토가 피해를 입기도 해 대부분 강과 떨어진 곳이나 비교적 높은 구릉에 취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임곡동, 등임동, 산막동, 고룡동, 신룡동, 두정동, 광산동, 오산동, 사호동 등 9개 법정동이 있고, 34개 자연마을이 있다.

임곡동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 중 가장 시대를 앞선 것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고룡동 창암요지(窯址)와 두정동 가정고분(古墳) 및 신룡동 신촌 유물산포지다. 또 신라 말기 또는 고려시대 초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신룡동오층석탑(유형문화재 제12호), 월봉서원 빙월당(기념물 제9호), 용진산 마애여래좌상(문화재자료 제11호), 백룡사지 부도 등이 있다.

행주기씨는 광곡마을, 신촌마을, 죽산박씨는 원임곡, 밀양박씨는 연동마을, 평택임씨는 내등과 외등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룬다. 함평이씨는 방혜마을, 청송심씨는 신봉정마을에서 주로 모여 살고 있다. 논농사를 짓고 감, 수박, 무 등을 재배하며 기대승과 윤상원을 배출했다.

특히 용진산에 금광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제는 금 수탈을 위해 임곡동에 치소를 두고 기지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전기 가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앞서 이루어졌으며 임곡역 또한 이 시기에 문을 열었다. 금광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면서 당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광복이후 금광업자들이 떠나고 노동자 일부가 임곡동에 정착하면서 마을구조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금광은 1970년대 초반까지도 유지됐는데 금을 캐기 위해 깬 석재의 양이 엄청나게 나왔다. 이 돌들은 광주 군공항 건설에도 이용됐다. 복영마을에 있는 금광굴은 현재 새우젓갈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 중이다. 이 외 하림마을에 남아 있는 향교 터는 이 지역이 아주 오래전부터 교육·행정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광곡마을은 백우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백우산의 넓은 계곡 안에 터를 잡고 있다 하여 ‘너브실’로 불리다 광곡(廣谷)마을로 바뀌었다. 조선 초기 평산신씨(平山申氏)가 개촌했다고 알려지며, 그 뒤 고봉 기대승이 신룡동에서 수학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와 정착했다고 한다. 기대승을 배향한 월봉서원과 묘소가 있다.

천동마을은 우물이 있어 ‘샘골’, 또는 ‘새암골’로 불리다 일제강점기에 한자로 마을 명을 개칭하면서 천동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마을 형성에 관한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오는데, 1480년경 박한곤이 당시 함평현감으로 있을 때 어룡동 박뫼마을이 명기(名基)임을 알게 됐다. 이에 장자 박배근(朴培根)을 그곳에 살게 하고, 차남 양근(養根)과 손자 황(璜)을 샘골에 살게 했다고 한다. 그 뒤 진주정씨 정만업이 함평 월야(月也)에서 옮겨와 정착한 후 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임곡동 천동마을은 항일독립운동가인 양인묵이 성장기를 보냈던 곳이며, 마을 입구 도로변에는 청주한씨 효열비도 세워져 있다. ‘광주의 5월’ 하면 떠오르는 인물,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기도 한데, 현재 해파재라 불리는 열사의 생가는 2005년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임곡동에는 자연환경을 홍보하고 지역 역사성과 문화성을 드러내기 위해 주민들이 선정한 임곡 8명소가 있다. 월봉서원, 백우산, 황룡강, 용진산, 신룡동 오층석탑, 용진문화쉼터, 코스모스 꽃길, 백우산 휴양림이다. 이곳 사람들은 인근의 4개 5일장을 필요에 따라 이용했다고 한다. 장성 황룡시장과 송정시장, 비아장, 임곡장이 그것인데 재밌게도 암소를 사러 갈 때는 황룡시장을 이용했고, 수소를 사러 갈 때는 송정 우시장을 이용했다고 한다. 시장이 열리는 날짜가 모두 달랐는데, 비아장은 1, 6일에 임곡장은 2, 7일에 송정장은 3, 8일에 황룡장은 4, 9일에 열렸고, 0일, 5일에는 장이 서지 않았다.

임곡은 치열한 도시에서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그리워하던 고향이었다. 윤상원 열사는 임곡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북중학교(북성중)에 입학했다. 농번기 일손을 돕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 떠나는 심정을 적은 1963년 6월 16일 일요일 일기는 13세 나이에 썼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조숙함이 느껴진다.
‘즐거웠던 농번기 동원도 오늘로서 마감이었다. 가고 싶지 않은 광주,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집을 떠나 임곡역으로 가서 12시 3분 기차를 타고 그리운 내 고향을 지나게 되었다. 우리 동네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쓸쓸하고, 우리 동네가 그리워 보였다.’

윤상원(1950~1980)
전남대를 졸업한 후 서울 주택은행에 근무하던 윤상원 열사는 1978년 교육지표사건이 터지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들불야학 활동을 하며 노동자 인권을 위해 노력하다 5·18이 일어나자 광주시민의 눈과 귀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를 제작해 배포했다.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계엄군이 진격해 오던 1980년 5월 27일 최후 결전의 순간까지 광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당일 계엄군의 총격으로 서른 살 생애를 마쳤다.
윤상원은 죽음을 앞두고 외신기자와의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1982년, 들불야학 활동을 함께 했으나 사고로 먼저 사망했던 후배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치렀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들의 결혼식에 헌정된 노래다.

기대승(1527~1572)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다. 1558년 급제한 뒤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검열, 홍문관 교리, 대사간, 공조참의 등을 거쳤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며 학문을 논쟁한 것이 유명한데, 특히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 이루어진 사칠논변(四端七情)이 유명하다.
사단칠정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과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키는 유교용어다. 네 가지 마음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착한 본성에서 비롯된다. 칠정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이다. 이 사단칠정은 주자학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언급할 정도로 우리나라 성리학 논쟁의 중요 쟁점이었다. 기대승은 “사단칠정은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 앞에 세울 비문을 기대승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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