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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조선 시대 광주목 마지면 반촌, 모촌, 선창

광산구 마을탐방 신창동1
신창동, 조선 시대 광주목 마지면 반촌, 모촌, 선창
거제반씨(巨濟潘氏) 개촌 반촌(潘村)으로 불리기도
매결(梅結), 매화 열매 맺은 모습 닮아 붙인 지명
견훤 진을 치고 말을 먹이던 방목평 속설도 있어
북쪽 15리 견훤 직접 군대 지휘했던 견훤대 기록
  • 입력 : 2022. 04.06(수) 12:56
  • 광산저널
[광산저널] ‘선사유적지’로 대표되는 신창동은 조선 시대 광주목 마지면 반촌(盤村), 모촌(暮村), 선창(仙倉)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판촌리(板村), 모구리(暮舊), 모신리(暮新), 탄동리(炭洞), 선창리(仙倉), 월촌리(月村) 일부를 통합해 신창리(新昌)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비아면(飛鴉面)에 편입됐는데, 1997년 비아동에서 신가동으로, 2009년 신가동에서 다시 분동해 지금의 신창동이 됐다.

◆반촌, 1600년대 거제반씨 개촌
1933년 인쇄된 지도에는 판촌(板村), 탄동(炭洞), 모신(暮新), 월촌(月村)마을 지명이 보인다. 구릉 사이사이 판촌과 모신마을이 위치하고 그 앞으로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영산강과 너른 들판이 펼쳐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탄동은 모신 마을 위쪽으로, 월촌은 강변에 있다. 이 가운데 판촌마을은 1600년대 거제반씨(巨濟潘氏)가 개촌 했다 해 반촌(潘村)으로 부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판촌(板村)을 거쳐 반촌(班村)으로 고쳐졌다.

◆매결, 청주이씨 이존신(李存信) 정착
모신마을은 매결(梅結) 마을이라고도 한다. 마을이 매화가 열매를 맺은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시대 문종 때 홍문관 교리를 지낸 청주이씨 이존신(李存信)이 터를 잡고 정착하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시 월촌은 지금의 반월마을로 보이는데, 언제 월촌이 반월로 바뀌었는지 알려주는 자료가 없다. 반월마을은 마을 형성할 때 이웃 마을 반촌과 월봉 첫 글자를 따서 반월(班月)이라 했는데, 이후 마을 형태가 반달과 같다 해 반월(半月)이라고 고쳤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당시 반월마을과 월봉마을에서 일부 주민이 옮겨왔다고 한다.

◆매결(모신마을) 견훤 흔적도
1910년대 자료에는 월촌리에 월봉산, 주막 월봉점, 간내나리로 부르던 나루 간천진이 있었고, 모신리에는 박메들이라 불렀던 방목평, 나루 풍영정진, 주막 모신점이 있었다. 방목평은 견훤이 진을 치고 말을 먹이던 곳이라는 속설이 있다. 주의 북쪽 15리에 견훤이 직접 군대를 지휘했던 견훤대가 있고, 그 아래 방목평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방목평은 오직 모신리에만 있는 야평명(野坪名)이다.

이 모든 과거의 흔적은 사라졌다. 1992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며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는데, 영산강 변의 농토가 아니라 구릉 지역이 개발됐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던 논은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거나 시설재배 하우스 또는 공장이 들어서 있다.
◆신창동 가구거리…한 때 공방도
산동교를 건너기 전 신창동 가구거리가 형성되어 있고, 2026년에는 상무지구와 첨단 산단 도로를 농지 사이로 개설할 예정이다.
신창동 가구거리는 북구 동림동 산동교에서 보건대 방향으로 난 북문대로에 조성된 거리다. 혼수품, 사무용품, 주방 가전제품 등 브랜드 매장부터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아울렛 매장들까지 다양한 가구 관련 업체들이 모여 있다. 신 창동 행정복지센터 옆 ‘공방의 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2010년 무렵부터 작은 공방들이 자생적으로 모이기 시작해 30여 개가 넘는 공방들이 자리를 잡으며 자연스레 ‘공방의 거리’가 만들어졌다. 마을 축제 등을 통해 알려지고 활성화됐으나 젠트리피케이션, 코로나 등의 영향으로 현재는 몇 개의 공방만이 남아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광산저널 webmaster@gsj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