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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어머니의 표상「의모당(義母堂)」

의로운 어머니의 표상「의모당(義母堂)」
의병장 고경명 장남 고종후 의병장 딸
양응정의 넷째 아들 양산축 부인 고씨
박뫼마을 양씨 삼강문 의병마을 표지석
조선 의병의 선각자 송천松川 양응정
  • 입력 : 2022. 10.17(월) 09:44
  • 광산저널
[광산저널] 광산(光山)은 예로부터 충의와 절의의 고장이었다.
나라가 환란이 닥쳤을 때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선열들의 의로운 정신이 어등산 곳곳에 남아있다. 어등산 북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박뫼 마을 입구에 ⌜제주양씨 삼강문⌟이 있고 ⌜의병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제주양씨 삼강문은 조선 선조시대 때 성균관 대사성 벼슬을 했던 송천 양응정(1519-1581) 선생 일가족이 행했던 충의와 효열을 기린 ⌜일문삼세 9정려(一門三世九旌閭)⌟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양응정의 두 아들 양산용, 양산숙이 의병장으로 나가 순국하고 이어서 그 일가족이 일본군경에 의해 몰살당했다. 이에 인조 임금으로 부터 충, 효, 열, 절(부)의 9정려를 내려 받은 것이다. 손자 양만용(한림학사)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의병 선각자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1519~1581) -
양응정은 기묘사화로 화를 당하였던 기묘명현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 1488~1545)의 셋째 아들이다. 문장의 대가로 알려진 양응정은 경학과 병법까지 연구해 아들과 제자들에게 전란에 대비하게 한 선각자였다.

조선 최초의 의병전쟁이었던 을묘년(1555년) 5월 11일 전남 영암 달랑포에 일본군이 배 70척과 일군 6천 명이 침입하여 강진, 진도, 장흥을 함락하고 전라병마절도사와 장흥부사 전사하고 영암군수는 생포됐다. 이때 양응정은 모친상을 당해 봉호정 마을에 시묘 살이 하고 있던 종형 양달수에게 “충과 효가 일치하니 일각도 지체 마시고 한 번 의려를 일으키십시오,”하고 의병장으로 출전시켜 조선 최초의 의병전에서 승전한다. 이듬해 명종11년(1556) 중시에 왜구와 여진족을 제압할 부국강병책인 ‘남북제승대책’을 세워 자주국방을 주장하여 장원 급제했다.

고시관으로 ‘천도책’을 출제해 율곡 이이를 장원 선발하고 이후 율곡과 철학 문답을 주고받음으로써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영향을 주었다.
양응정은 당대 8대문장가로 알려졌다. 어등산 자락에 임유정을 짓고 정철, 백광훈, 최경회, 최경창, 박광전, 김덕우, 신립, 정운, 안중묵 등을 제자로 양성하면서 장차 있을 왜침을 예고하고 수군증강과 진법 등 병법을 익혀 전략에 대비토록 했다. 양응정의 후손과 제자들은 양응정의 절의를 이어받아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의병으로 활약하였으며, 종래에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발판을 마련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양응정의 영향력은 임진왜란 의병에 이어 병자호란 의병까지 미쳤다. 그 후 한말 호남의병으로 이어진다.

∎ 의로운 어머니의 표상 ⌜의모당(義母堂)⌟
박뫼 마을 ⌜제주양씨 삼강문⌟ 위쪽에 ⌜의모당⌟터가 있다.
의모당 고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 의병장의 딸이자 양응정의 넷째 아들 양산축의 부인으로 의로운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양응정의 부인과 자식들이 왜군에 항거하여 바다에 몸을 던질 때 의모당 고 씨도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여종들이 살려냈다. 이때 뱃속에 품은 아이가 나중에 한림학사 양만용으로 제주양씨의 대를 잇는다.

의모당 고 씨는 온 가족을 전란데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들까지 의병장으로 내보냈다.

의모당 고씨의 입장에서 보면 시가에 아홉 분의 충, 효, 절의를 받은 집안이요 친가에는 세분의 충렬공이 있는 집안으로 그야말로 나라에 목숨을 바친 두 가문의 중심에 있는 여인으로 의가의 맥을 이은 장한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 자식 교육의 어머니 표상으로 ⌜신사임당⌟이 있다면 광주에는 의로운 어머니의 표상으로 ⌜의모당⌟이 있는 것이 다. 의로운 광주 정신의 뿌리가 여기에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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