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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송정리역 ①
  • 입력 : 2024. 04.25(목) 08:58
[광산저널] ∎ 송정리역 개통, 천지개벽

111년 전 일제강점기 일제는 호남지역 곡창지대의 식량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등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3년 10월 1일 ⌜송정리역⌟을 개통하였다. 송정면의 본래 지형은 바닷물이 빠지고 갯벌에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였다. 송정松汀이라는 뜻을 보면 물가, 모래 늪지에 소나무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늪지대의 허허벌판에 송정역이 들어서면서 오지였던 광산지역은 천지개벽을 맞이한 것이다.

송정리역이 창설되기 8년 전부터 일본인들이 이미 송정리역에서 4킬로 미터 반경, 요지의 땅을 무작위로 사들인 것, 그래서 지금의 송정리역에서 송정동과 도산동 주변 택지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점유했던 소위 적산 땅이었다. 그리고 현재 광산구청 대지 일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무역창고를 짓고 농민들에 수탈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침탈사례 중의 하나이다.

⌜송정리역⌟이 개통되어 거대한 역세권을 형성하면서 운수, 금융, 상업의 중심지로 급속히 부상하였으며, 일본인과 한국인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밀려들게 되었다. 대개 일본제국의 영향을 먼저 받았던 부산, 대구에서 인구가 들어왔다. 역세권의 형성은 송정리를 중심으로 인근의 평동, 본양, 삼도, 동곡, 서창, 하남이 포함되고 있었다. 역세권 인구는 급증하여 1910년대 초기에 한국인이 1만 5천 명에서 1929년 5만 명 선, 1942년에는 7만 9천 명으로 놀라운 증가 추세를 보였고, 일본인은 초기에 5백여 명에서 1920년에 천여 명, 1930년대 천 오백여 명, 1942년에는 천 8백여 명을 넘었다.

송정리역의 형성은 상업인구의 증가와 함께 공장들도 세워졌다. 공장은 공업 분야가 아니고 농업생산물과 관련한 공장이 대부분이었다. 주로 양곡 도정공장과 술도가가 먼저 들어선 후 철공장, 정미 공장, 벽돌공장, 제사공장 등이 한두 개씩 세워졌다. 특히 양곡을 탈곡하는 도정공장이 많이 늘어나 16개나 되었다, 노동자들은 대개 도정공장에 고용된 이들이었다. 도정공장의 노동자들은 역의 화물을 취급하는 운송노동자와 더불어 양대 노동자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송정리역 주변에 천여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운집할 정도였다.

∎10년 후 광주역이 생기다.

1922. 7. 1 송정 광주 간 역이 개통되었다. 광주 시내 요지는 이미 일본인들이 점유하여 농사를 짓거나 점포를 지어, 영업하기 시작했다. 송정리역은 호남선 및 경남으로 연결되는 경전선과 교차 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철도의 주요 기착지가 되면서 물류와 인구가 증가하여 송정면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광산군 소재지가 되었다. 그리고 100년 후 2013년 호남고속철도 KTX 역이 되어 ‘광주송정리역’으로 개명되면서 광주의 관문이 되었고 이어서 ‘광주송정리역복합환승센터’로 지정되어 또다시 광산지역이 천지개벽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 추억의 ‘구름다리’와 ‘기관고’


송정리역 안에 철길 위로 설치된 구름다리는 송정리역을 상징할 정도로 매우 컸고 높아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그 당시 우리 고장에서는 가장 큰 건축물로 목조 구조물이었다. 역 안의 철로 선을 넘나들어 오르내리며 상, 하행 열차 플랫폼에 연결하는 구름다리(과선교跨線橋)가 1930. 12. 25 준공되었다. 목재로 만들어져 오르내릴 때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 ‘딸각 다리’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기관고’는 기차 화통에 물을 보충하는 시설물로 저수지에 높게 세워진 첨성대 같은 구축물이 있었다. 그리고 기차 화통의 방향을 180도 돌리는 원형 회전대가 있었는데 그곳이 필자의 고교 시절에 우리들의 은밀한 아지트였기도 했다.
gsjn@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