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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我私第心書 사랑하는 동생에게
國家安危在頃刻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려 있거늘
意氣男兒何待亡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盡忠竭力義當事 온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志濟蒼生不爲名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함이 아니라 네
兵死也含笑入地可也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동생 김율 의병장은 “대장부가 이런 세상을 당하여 거의 하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기꺼이 받아들인다.
1908년 4월 25일 어등산 서봉마을 마당바위 위쪽 토굴에서 김태원(준) 의병장(38)과 의병 23명이 순국하였다.
1908년 4월 26일 어등산에서 김율 의병장(27)은 형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고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죽봉로- 농성광장에서 동운고가까지 도로 명
김태원은 1894년(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24세에 동학농민혁명에 투신하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생 율과 함께 의병을 모아 1906년 7월부터 나주·함평·영광·장성·무안·광주 등지의 사람들과 부대를 꾸려 1907년 음 9월경 장성 삼계면 수연산에서 의병을 창의한 기삼연을 만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선봉장으로 맹활약을 하면서 많은 전적을 세웠다. 문수사 기습 전투, 고창읍성 점령, 담양 남면 무등산 무동촌 전투, 장성 토천 전투, 영광 낭월산 전투, 법성포 일본인 시설 파괴 등 영광, 나주, 함평, 무안에서 40여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 군경은 이러한 김태원을 가장 큰 적으로 적시하여 최우선 처단 목표물로 정해 1908년 3월 제2특설순사대울 편성하여 작전을 폈다.
그런 와중에 기삼연 의병장이 순국하자 김태원, 김율 형제는 호남창의회맹소를 ‘호남의소’로 이름을 바꿔 더욱 적극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4월 19일 일 군경은 또다시 김태원 의병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광주수비대의 8개 종대를 편성해서 15일간 군사 작전을 펼친다.
4월 22일 김태원 의병부대(80명)는 광곡 마을(월봉서원)에서 일본 수비대의 기습을 당해 3명이 죽고 후퇴하다 까막뫼(오산마을)에서 또 기습을 당하였다. 김태원은 허리 부상을 입고 어등산 박뫼 마을에 은신하였다. 일본 수비대는 김태원의 소재를 파악하여 포위망을 좁혔다. 4월 24일 김준 의병장은 부하 23명과 매봉 쪽 토굴로 이동하여 은신하고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제3수색대의 전방 약 300m의 바위굴로부터 비교적 미복의 1인이 도주하자 사살하였다. 시신을 검토했는데, 하얀 두루마기와 물색 비단 저고리를 착용하였고, 쌍안경 1개, 조선도 1개, 서류 약간을 소지하였다.
당대의 유학자 후석 오준선의 ⌜후석유고⌟에 이날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연초부터 ‘김태원 잡기 15일 작전’을 3번이나 실시한 일본군 기병대와 제2순사대가 이날 박산마을을 사방에서 포위하자 김태원 의병장은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장차 왜놈의 칼날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다.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으니 뒷일을 힘써 도모함이 옳다.“며 부하들에게 피신을 명령한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대장을 홀로 남겨둘 수 없다“며 부하 김해도 등 23명은 끝까지 항전하여 모두 함께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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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5(목) 1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