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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출신 … 죽파 오성술 의병장

광산 출신 … 죽파 오성술 의병장
  • 입력 : 2022. 12.14(수) 10:11
  • 광산저널
[광산저널] 의병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민군이다. 일제의 막강한 군경과 맞서면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의로운 정신으로 분연이 나선 것이다. 신분을 감추면서 의병 전에 참여해야 했고 기록이나 흔적들을 없애야 하는 처절한 환경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은 당시 일본 군경의 작전일지 등의 기록에 의해 확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우리 광산 출신 의병장으로는 죽파 오성술, 오상렬, 이기손, 김동수, 박현동, 오권선, 오계수, 오용근, 오인수, 김봉선, 김경화, 김봉규, 김연순, 송 타, 이현주, 최군선 등으로 알려져 있다.

1 죽파 오성술(吳成述, 1884~1911)의병장
죽파 오성술(吳成述, 1884~1911)의병장은 1884년 5월15일 삼도면 송산리 죽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선 세조 때 이시애 난을 진압한 오자치 장군의 15대 손이다. 18세 때에 족숙인 유학자 후석 오준선(용진정사)으로부터 도학과 경학을 공부하여 21세(1905년) 때 충의참봉(忠義參奉)의 관직을 받아 오참봉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아버지에게 글을 올렸다.
“나라가 흥망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소자 비록 백면서생이나 혈기 방장하온데, 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앉아 있겠습니까?”아버지 오영선은 전답 50마지기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1907년 10월 30일. 기삼연을 중심으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오성술은 의병부대에 편성하였다. 도통장 오상열, 선봉장 김성연, 중군장 오연규, 도포장 김봉선, 호군장 이종석, 후군장 양치홍, 좌익장 오성범, 우익장 양지술, 군량장 김목사리로 부대를 편성한 후 의병장 기삼연의 휘하에 투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 김태원 선봉장의 핵심 참모로 활약하다가 후에 오참봉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고창 문수사에서 전투에서 승리하고 고창읍성을 점령하고, 영광 법성포를 공격했다. 1908년 10월 23일 석문산 내 전투에서 의병 11명 전사, 화승총 5정, 권총 1정, 나팔 1개, 기타 잡품 빼앗겼다.

1908년 12월 나주군 노안면 신기촌에서 밀정 황아무개를 처단하고 1909년 1월 31일 광주군 대지면 곡촌의 일본인 지주 농장을 습격해 곡물 등 노획(2천 5백여 원 거금 해당)했다. 1909년 2월 나주군 신촌면 곡룡동에서 밀정 나 아무개를 처단하는 등 남도 땅에 경제 침탈한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오성술은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유격전투를 전개하면서 필요할 때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전개하기도 했다.

1909년 9월부터 일제는 호남의병을 초토화하기 위해 ‘남한폭도대토벌작전’전개하였다. 10월 2일 오성술과 30여 의병은 다시면 백마산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이송되었다. 1910년 11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강도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살인 및 방화죄가 추가되어 1911. 6. 17 교수형을 선고 받고 9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내 평생 시름없는 사람이라 자위했건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져 그 걱정뿐이네
술 속의 취기는 밤낮이 없건만
글 속의 대의는 춘추를 지녔구나
집안이 기울어도 천금 부자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붓을 내던지니 오직 백성 시중들 생각만 하네
세상살이에 마음속 일을 알기 어렵지만
분노 그 밖에 무엇을 구하겠는가.“

정부에서 지난 1977년 12월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하였다.
2015년 광산구 예비군 대대와 광산문화원(원장 이현선)은 예비군대대 명칭을 ⌜죽파부대⌟로 정하여 죽파 오성술 의병장의 의로운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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